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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자생물학

by JJunmom 2025. 8. 27.

분자생물학(分子生物學, Molecular biology)은 넓은 의미에서는 분자 수준에서의 생명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생명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규명하는 생물학의 분과, 좁은 의미에서는 어떤 유전물질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단백질로 변화하는지 규명하는 생물학의 분과이다. 분자생물학은 현대 생물학의 중추 학문이다. 생리학, 병리학, 유전학, 발생학은 물론이고 해부학, 진화생물학, 계통분류학, 생태학까지의 모든 생물학 분야의 기반이다. 즉, 그만큼 생물학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다.
분자생물학이란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1930년대 록펠러재단의 워렌 위버였다. 그는 1938년 새로운 과학분야로 "분자 생물학"을 지칭했으며, 이에 부응하여 여러 물리학 연구소(특히 보어연구소)가 연구방향을 생물학적으로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점은, 분자생물학은 그 당시부터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란 것이다. 본격적인 분자 생물학의 시작은 15년 뒤인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어 유전현상의 메커니즘을 분자적 수준으로 낮춘 것부터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분자생물학저널(Journal of Molecular Biology)는 1959년에야 등장했다.

분자생물학은 크게 세 가지 접근 방법에 의해서 갖추어졌다. 하나는 구조적 접근, 하나는 생화학적 접근, 하나는 정보적 접근이다. 또한 1940년대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이 대거 생물학에 뛰어들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구조적 접근>
1912년 영국의 윌리엄 헨리, 윌리엄 로랜스 브래그(Bragg) 부자는 X선의 회절 현상을 평면형 반사 실험으로 밝혀내였다. 이를 통해서 여러 생물 분자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특히 케라틴등의 단백질과 핵산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이 1930년대 후반 J.D. 버널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오랜 분자구조 연구의 전통은 1959년 케번디시 연구소의 존 켄드류와 막스 페루츠의 헤모글로빈과 미오글로빈의 발견(1962년 노벨상 수상)과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DNA 구조 발견에 경쟁하던 모리스 월킨스,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까지 이어진다.

<생화학적 접근>
1869년에 이미 스위스의 프리드리히 미셔(미셰르)는 붕대의 고름에서 백혈구를 추출하여 핵산(당시엔 뉴클레인Nuclein)을 발견한 상태였지만, 세포에서 핵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기도 아니었고, 유전은 커녕 멘델의 유전자란 개념도 20세기 초반에야 재발견 되는 판국에 무슨 의미를 가질리가 만무했다. 1909년 멘델이 재발견 될 즈음이 돼서야, 애키발드 개러드는 멘델의 유전자론을 두고 효소를 통한 대사과정에서 영향을 미친다는 가설을 낸다. 그때 막 결핍에 따른 "대사성 질환"이란 개념을 제시한 것인데, 역시 묻혔다. 각기병이나 괴혈병이 그 뒤에야 원인이 밝혀졌다는걸 생각하면 된다. 결국 1928년 영국의 프레더릭 그리피스(Frederick Griffith)가 "형질전환의 원리(Transforming Principle)"를 발견했고, 1930년대가 돼서야 유전이니, 효소니 하는 생화학적 접근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초파리 연구로 유명한 Caltech의 토머스 헌트 모건은 유전의 원리에 대해서는 밝혀냈다. 이제 유전자에 무언가 방사능으로 이상을 주면 형질이 변한다는 것 까지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물리적 근거는 부족한 상태였다. 모건의 제자이자 록펠러 재단의 포스닥 연구장학생이었던 조지 비들은 초파리로 1931년부터 6년을 씨름하다가 1937년이 돼서야 스탠퍼드 대학교 교수로서 붉은빵곰팡이로 유전자의 생화학적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서 비들과 에드워드 테이텀은 각 유전자는 한 개의 효소의 합성만을 조절한다는 "1유전자 1효소"설을 주장한다. 물론 이것도 현대의 기준에서는 틀린 이야기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유전자와 단백질(효소)의 생산을 조절, 통제하여 세포의 대사를 조절한다는 이야기는 엄청난 이야기였다. 하지만 생화학이 "분자생물학"과 결합하는데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보적 접근>
닐스 보어는 1932년부터 생물학에 불확정성의 원리를 도입하려는 작업("생명과 빛(Life and Light)")을 시작했다. 유기체에 대한 기계적, 환원적, 화학적 접근이 아닌 보다 높은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시작했던 것이다. 괴팅겐의 원자물리학자 막스 델브뤽은 록펠러 재단의 연구장학생으로 코펜하겐의 보어에게 가서 그의 적극적인 추종자가 되었고 이 접근을 더욱 구체화 하였다. 1938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델브뤽은 Caltech에서 '파지 그룹'을 통해 단백질(박테리오파지)에 집중하여 자신의 이런 연구를 구체화 시켰고, 젊은 물리학자(이탈리아 출신 살바도르 루리아, 허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1942년, 델브뤽과 루리아는 박테리아의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저항력이 돌연변이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결정적인 계기가 또 있었다. 1944년 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라는 역사적인 책을 내면서 유전자를 "정보 운반체"로 간주하자며 생명체를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물리법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기서 유전물질의 여러 후보를 거론했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백질이었다. 미국으로 넘어온 대규모의 과학자 집단, 기술적인 발달, 패러다임의 전환, 이 모든 것은 결국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